오늘은 고려 초기 왕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세히 다루지 못했던 고려 제 2대왕 혜종과 33대 왕 정종 시기에 있었던 왕규의 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왕무(혜종) vs 왕요(정종), 왕소(광종)
1) 세력이 약했던 혜종
혜종의 어머니인 장화왕후는 나주 출신 다련군 오희의 딸인데, 오희는 다른 호족들에 비해 세력이 약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태조는 혜종을 후계자로 삼는데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박술희와 왕규를 왕무(혜종)의 후견인으로 삼아 뒷날을 부탁했습니다. 왕규는 두 딸이 태조의 제 15비, 제 16비였고, 또 다른 딸은 혜종의 비가 되었기에 후견인으로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태조가 죽은 뒤 태조와 혼인해서 아들을 낳은 충주 유씨, 황주 황보씨, 정주 유씨의 세력이 힘을 합치며 혜종에게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태조의 3번째 왕비인 신명순성왕후의 아들 왕요, 왕소 형제가 강력한 외가 세력을 배경으로 혜종과 대립했습니다.
혜종에게는 아들인 홍화군이 있었지만 왕요, 왕소 형제는 혜종의 왕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2) 혜종 vs 왕요, 왕소 형제
그러다 혜종이 즉위 2년 만에 심각한 병에 걸려 병석에 눕자 양측의 대립이 표면화되었습니다. 혜종의 지지 세력은 전라도 나주, 충청도 진주(진천), 경기도 광주에 있었습니다. 나주에는 혜종의 외가가 있었는데 태조가 후백제와 싸울 때 6년간 머물렀던 곳이었고, 진주(진천)에는 혜종의 처가가 있었으며, 광주는 혜종의 또 다른 처가, 바로 혜종의 후견인인 왕규의 근거지였습니다.
반면 왕요, 왕소 형제의 지지 세력은 충청도 충주, 전라도 승주(순천), 경상도 경주, 황해도 황주, 황해도 평주, 평안도 서경(평양) 등에 있었습니다. 충주는 교통의 요지로 왕요, 왕소 형제의 외가가 있는 곳이었고, 승주에는 왕요의 처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는 왕요, 왕소 형제의 누이인 낙랑공주(태조의 첫째 딸)와 결혼한 경순왕이 있었고, 황주에는 왕소의 처외가가 있는데, 황주 황보씨는 충주 유씨와 함께 고려 호족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또한 평주(평산)의 호족인 박수민과 박수경이 왕요, 왕소를 도왔고, 대동강 유역의 서경을 관리하던 태조의 사촌 종생 왕식렴도 왕요, 왕소 형제를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기반을 가진 왕요, 왕소 형제에게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와 왕규는 커다란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술희와 왕규는 힘을 합치지 못했고, 혜종의 총애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습니다. 나중에 혜종의 뒤를 이어 정종으로 즉위하게 되는 왕요는 이러한 갈등을 이용해 박술희가 다른 뜻이 있다 하여 유배를 보냈고, 왕규는 그 틈을 타서 왕명이라 속여 박술희를 제거했습니다.
2. 왕규의 난
혜종 2년(945년) 왕규는 혜종의 동생인 왕요, 왕소 형제가 혜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요, 왕소 형제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렸지만, 왕요, 왕소 형제 뒤에는 너무나도 강력한 호족 세력이 있었기에 혜종은 이들을 통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혜종은 왕규가 자신의 동생들을 모함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맏딸을 왕소와 혼인시켜 사태를 무마하려는 유화책을 펼쳤습니다. 이제 왕소는 혜종에게 동생인 동시에 사위가 된 것이었습니다. 혜종은 동생은 모반할지 몰라도 사위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혜종에게 불만을 품은 왕규는 다른 뜻을 품었습니다. 자신의 외손자이자 태조의 제16비 소광주원부인이 낳은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이었습니다. 왕규는 혜종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자객을 보냈으나 혜종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한 주먹으로 쳐 죽인 후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왕규는 다시 한번 자객을 보내 벽을 뚫고 혜종의 침소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침소가 비어 있었습니다. 혜종은 왕규가 행한 바를 역시 알고 있었으나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왕규의 계획을 눈치챈 혜종의 동생인 왕요, 왕소 형제는 왕규의 반란을 막을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결국 왕요, 왕소 형제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왕식렴이 서경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와 왕규를 진압했습니다. 반란 계획이 무산되면서 왕규와 그의 무리 300여 명은 모두 역모 죄로 처형되었습니다. 고려사에는 혜종 재위 중에 일어난 이 사건을 왕규의 난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왕규의 난에 대한 의문점
왕규의 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우선 혜종의 장인이었던 왕규가 혜종을 죽이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규는 혜종을 살해하기 위해 자객을 두 번이나 보냈는데, 혜종은 왕규를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개경에서 140km나 떨어진 서경에 있는 왕식렴이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점에 딱 맞춰 개경에 등장하는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혜종에게 자백을 보낸 것은 사실 왕요, 왕소 형제인데 그 누명을 왕규에게 씌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왕규가 실제로 군사를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고 볼 만한 정황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원칙대로라면 혜종이 죽은 뒤 아들인 홍화군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하는데, 왕규의 난을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왕요가 추대 받아 조카인 홍화군을 제치고 제 3대 정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왕규의 난은 사실 왕요, 왕소 형제가 혜종의 후견인인 왕규를 제거하고 왕위를 누린 고려판 왕자의 난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한국사 쉽게 알아보자 11 – 고려 초기 왕들(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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