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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쉽게 알아보자 5 – 백제의 성립, 발전,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

by 토마토킴 2023.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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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삼국 중 고구려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삼국 중 백제에 대해서 알아보겠는데요, 백제의 성립과 발전 과정, 그리고 멸망과 부흥운동에 이르기까지 함께 나눠보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백제의왕들
백제 왕들



1. 백제의 성립


온조왕

온조와비류
온조와 비류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건국됩니다. 온조왕의 아버지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었습니다. 주몽은 북부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를 피해 임신 중인 예씨 부인을 두고 졸본부여(졸본)로 도망갑니다. 당시 졸본부여의 왕은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의 비범함을 알아보고는 그에게 둘째 딸 소서노를 시집보냅니다. 주몽은 소서노에게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비류고, 둘째는 온조였습니다. 그런데 주몽과 예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가 졸본으로 내려오자, 비류와 온조는 신하와 백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온 아들 중 비류는 바닷가를 원해, 바다 근처의 미추홀(인천)에 자리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한강)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했습니다. 후에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그의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위례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온조와 비류의 세력이 합쳐지고 나라의 이름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습니다.
백제의 건국 신화를 통해 우리는 백제가 고구려의 유민이 한강유역의 토착민과 함께 세운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고분 양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두 나라 모두 돌무지무덤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고구려의 장군총, 백제의 석촌동 고분). 또한 백제는 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기도합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 사람이니, 주몽의 아들인 온조의 뿌리도 부여에 있겠지요. 그래서 백제는 왕족의 성씨를 부여씨로 하였습니다.


2. 백제의 발달


1) 고이왕
3세기 중엽 고이왕 때는 형제 상속을 통한 왕위 세습이 확립되었습니다. 고이왕은 중앙집권적 통치를 위해 6좌평관등제관복제를 제정했습니다. 먼저 6좌평을 실시하여 내신좌평은 왕명 출납을, 내두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위사좌평은 숙위 병사를, 조정좌평은 형벌과 송사를, 병관좌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또한 고이왕은 관리를 16 관등으로 나누고, 등급의 맞는 옷의 색깔을 정했는데, 6품 이상은 자줏빛 옷을 입고 은 꽃으로 장식하게 했으며, 11품 이상은 붉은 옷, 16품 이상은 푸른 옷을 입게 했습니다.
고이왕은 대외적으로 북쪽으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고, 마한의 목지국을 제압하여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된 문물을 수용했습니다. 고이왕의 이러한 노력으로 백제는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2) 근초고왕

근초고왕때의지도와칠지도
근초고왕때의 영토(좌)와 칠지도(우)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백제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국가의 기틀을 다진 건 고구려보다 늦었지만 3국 중 가장 먼저 백제가 전성기를 맞았는데, 그 이유는 한강 유역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근초고왕은 왕위의 부자 세습을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한반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영향력을 뻗쳤습니다. 먼저 남쪽으로는 마한 전체를 병합해 한반도 남쪽의 곡창지대를 확보합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371년), 황해도 일부를 차지합니다. 이렇게 고구려를 대위기에 빠뜨린 백제는 서남해를 모두 장악하고 요서 지역산둥반도 그리고 일본의 규슈까지 진출합니다.
근초고왕은 활발한 대외교류를 했던 왕으로도 유명합니다. 중국의 동진과 국교를 체결했으며 왜와도 긴밀하게 교류했습니다. 왜와의 교류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는 칠지도가 있는데, 칠지도를 통해 백제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알 수 있고, 이 칼을 왜의 왕에게 선사했다고 하니 백제와 왜가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3) 침류왕
384년 백제의 15대 왕으로 침류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동진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삼국에서는 고구려 소수림왕에 이어서 두 번째로 불교를 수용한 것입니다.


4)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 때는 고구려가 열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때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침류왕이 죽고 그의 동생이었던 진사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진사왕은 고구려의 고국양왕을 공격하여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관미성을 비롯한 많은 영토를 잃게 되었습니다.
진사왕이 죽고 침류왕의 아들이었던 아신왕이 백제의 17대 왕이 되었습니다. 아신왕은 거듭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인 전지를 일본에 보냈습니다.
아신왕이 사망하고 아신왕의 둘째 훈해가 왜에 갔던 전지를 기다리며 섭정을 하고 있었으나 아신왕의 막내 설례가 훈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설례가 죽고 나서 전지는 왜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고, 중국의 동진과 왜와의 우호관계를 지속했습니다.


5) 비유왕
고구려 장수와의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비유왕은 신라의 눌지마립간왕과 나제동맹(433년)을 맺습니다. 이때의 동맹은 군사동맹이었고 공수동맹이라고도 합니다. 이외도 왜, 중국의 송 등과도 우호관계를 맺으며 고구려를 견제했습니다.


6) 개로왕
거듭되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 개로왕은 중국 부위에 국서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지만 북위가 거절합니다. 이 사실을 안 장수왕은 뛰어나 지력가이자 바둑의 고수였던 승려 도림을 보내 개로왕의 환심을 사게 만듭니다. 도림은 개로왕으로 하여금 왕실을 화려하게 증축할 것을 건의하여 나라의 재정을 무너뜨렸고,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보고하자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합니다. 장수왕을 막아보려 했던 개로왕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며 개로왕이 전사(475년)합니다.


7) 문주왕
개로왕이 죽고 아들인 문주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문주왕은 수도를 지금의 공주인 웅진으로 천도(475년)했는데,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게 됩니다.


8) 동성왕
백제의 동성왕은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신라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결혼동을 맺어 신라와의 나제동맹을 강화합니다(493년). 결혼동맹을 맺을 때 신라의 왕은 소지마립간이었습니다. 또한 동성왕은 남조와의 교류를 재개하며 백제의 도약을 시도합니다.


9) 무령왕

무령왕릉과금송관과지석
좌측부터 무령왕릉, 금송으로 만든 관, 무령왕의 지석

이러한 백제의 중흥 노력은 6세기 무령왕 때 더욱 활발해집니다. 무령왕은 먼저 귀족세력을 통제해 왕권을 강화하였고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무령왕은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했는데, 담로란 왕족을 파견한 지방의 행정구역을 뜻합니다. 지방에 자신의 최측근을 보내 귀족들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왕권을 탄탄히 한 것입니다.
무령왕은 중국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양직공도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양직공도란 중국 양나라에서 만든 사신도인데, 여기 보면 백제의 사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 남조(양나라)와 백제의 문화교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의 활발한 문화교류를 알려주는 유물로는 무령왕릉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무령왕릉은 백제가 중국의 남조나 왜와 긴밀하게 교류했다는 걸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무령왕릉은 기존의 백제 무덤과는 달리 벽돌무덤이었는데, 이것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무령왕의 관은 금송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금송은 일본에서만 자라는 소나무입니다. 금송을 무령왕의 관으로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왜와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령왕릉에서는 지석(묘지석)이 발견되었습니다. 백제의 왕릉 중 유일하게 무령왕릉만 지석 덕분에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것입니다.


10) 성왕

관산성전투에서패배한성왕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성왕

성왕은 수도를 수로 시설이 좋고 넓은 평야가 있는 사비(부여)로 천도(538년)하고 부여의 계통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국호를 남부여로 고칩니다. 성왕은 통치 조직을 새롭게 정비합니다. 중앙관청을 22로 확대하고 중앙과 지방을 5부 5으로 나누면서 행정구역을 개편합니다. 그리고 성왕은 불교를 장려했고, 승려 노리사치계를 통해 왜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겼던 한경 유역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신라의 진흥왕이 배신을 합니다. 사실 한강을 차지하고 나면 한강 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갖기로 한 거였는데,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하고 싶었던 신라의 진흥왕이 백제를 기습 공격해 백제는 그만 한강을 뺏기게 됩니다. 이에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관산성에서 큰 전투가 벌어집니다(554년). 그러나 안타깝게 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은 전사하고 맙니다.


3.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1) 무왕

미륵사지석탑
미륵사지 석탑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죽자 120년간 이어졌던 끈끈한 나제동맹은 파괴되고 두 나라는 원수가 됩니다. 백제는 왕이 죽고 혼란에 빠졌지만 7세기 초 무왕이 왕위에 오르며 백제의 부흥을 꿈꿉니다. 무왕은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입니다. 참고로 서동요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던 서동은 신라의 선화공주가 무척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서동은 선화공주와 결혼하기로 결심을 하고 산에 가서 마를 듬뿍 캔 다음 신라로 떠났습니다. 신라의 수도인 금성에 도착한 서동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노래 하나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맛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희한한 노래가 골목 가득 퍼져 신라 궁궐에 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신라 진평왕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냅니다. 왕비님은 그런 선화공주에게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습니다. 공주가 귀양지로 가는 도중 서동이 나타나 모시고 가겠다고 하자 공주가 허락했고, 둘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효력을 알았습니다. 백제로 돌아온 후 공주가 왕비님이 준 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하니, 서동이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는 그런 황금이 많아 쌓아 놓았다고 합니다. 선화공주는 크게 놀라며 금을 신라의 궁궐로 보내자고 하고 서동은 지명 법사의 신력을 빌려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금을 신라 궁궐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서동은 인심을 얻어 백제의 왕위에 오릅니다.
무왕은 신라와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켜 백제의 영토 수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수나라와 당나라, 왜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무왕은 익산에 미륵사를 세워 민심을 추스르러 했습니다.


2) 의자왕과 백제의 멸망
무왕이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의자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 신라는 선덕여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 신라의 성 40여 개를 무너뜨리고 대야성마저 점령합니다. 이때 대야성의 성주도 죽임을 당했는데, 이 대야성의 성주가 바로 신라 김춘추의 사위였습니다.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동시에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김춘추는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연개소문이 도움의 조건으로 한강 땅을 요구했고 협상이 결렬됩니다. 결국 김춘추는 648년 당으로 넘어가 당에 도움을 요청했고, 고구려에 복수를 생각하고 있던 당태종이 이를 수락해 나당연합이 결성됩니다.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으로) 백제의 국력이 쇠퇴하자, 당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과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왔습니다. 의자왕은 당나라를 방어하기 위해 전병력을 보냈지만 성과가 없었고, 계백장군에게 5000의 결사대를 주어 신라군을 막으라고 했지만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 장군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사비성이 함락되며 백제는 멸망하고 맙니다.


3) 백제의 부흥운동
당나라는 멸망당한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합니다. 이에 좌평 출신의 복신과 승려 도침이 주류성을 근거지로 일본에 있던 백제 왕실 부여풍을 임시왕으로 추대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을 전개합니다. 한편 백제의 장군 출신 흑치상지도 임존성에서 당나라에 항전합니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복신과 도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고, 복신이 도침을 제거했고, 또 부여풍이 시기, 질투에 복신을 살해하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삽시간에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663년 백제를 도와주러 온 왜 함대 400척이 한국의 백강구에서 당나라 배 170척에게 모조리 전멸해 버리면서 백제의 부흥운동도 끝이 납니다. 당나라 정부는 의자왕의 장남이었던 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앉히며 민신을 수습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나당 전쟁 때 신라가 최종 승리하면서 웅진도독부는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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